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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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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국의 오판 === 초기 연합군인 프랑스와 영국은 군사/외교적으로 결정적인 오판을 반복한다. 양국의 핵심적인 실수 2가지는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했다는 것과 그로 인해 독일과의 전면전을 극단적으로 회피하고 수세적인 군사 전략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영불 양국이 대공황으로 인한 정치경제적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대중의 반전 여론이 극도로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프랑스]]는 구 [[프랑스 왕국]] 시절부터 전통적인 인구 대국이자 육군 강국이었다.[* 특히 최초로 근대적 징병제를 도입한 [[나폴레옹 1세|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 제1제국]] 시절엔 이런 특성이 절정에 달했다. 당시 프랑스는 전근대 유럽에서 유일하게 100만이 넘는 병력을 뽑아내며 여러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치렀고 거뜬히 감당해냈다.][* 독일이 프랑스 인구를 추월한 건 비교적 최근인 1871년이다. 러시아의 경우 1814년 프랑스 인구를 추월했다. 허나 비록 기술의 발달로 평균 수명이 늘어 났지만, 프랑스 혁명의 혼란과 혁명 전쟁의 여파, 그외 여러 가지 요소로 인해 프랑스는 1864년부터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인구 대국인 만큼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열강 중에서 대규모 [[징병제]]를 유지하는 단 둘뿐인 강대국이기도 했다.[* 나머지 하나는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 독일도 허울뿐인 징병제는 유지했지만, [[베르사유 조약|군비 제한선]]이 너무 엄격해서 실질적으로는 [[모병제]]나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방대한 상비군 외에도 즉시 소집 가능한 예비역까지 가공할 수준이었다. 이는 서유럽에서는 당연히 최대 규모였고 당시 이보다 규모가 큰 육군을 가진 나라는 인구가 억대를 넘어가는 [[중화민국 국민정부|중국]][* [[국민혁명군|중국군]]은 이미 [[일본군]]과 [[중일전쟁|박터지게 싸우는 중이었다]]. 그나마도 중일전쟁 개전 시점에서 중국군은 180개 사단의 규모였으며 중국군 1개 사단은 1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편제였기 때문에 중소 군벌을 합쳐도 의외로 중국군은 1937년 시점에서 의외로 200만 좀 넘는 수준이었으며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400만 정도로 늘어난다. 즉 1937~1939년 시점에 비하면 오히려 프랑스가 더 많았다.]과 [[소련]][* 1941년 시점에서 303개 사단, 22개 독립여단, 총 550만 명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다.]뿐이었다. 실제로 프랑스는 1939년 9월 개전 직후 제1차 동원령으로 1940년 5월 시점에서는 [[프랑스 식민제국|프랑스 본토 및 전 식민지]]를 통틀어 총 600만에 달하는 대군을 소집했다. 그리고 이들은 기본 훈련까지 수료한 상태였다. 같은 시기 독일은 프랑스보다 인구가 훨씬 많았음에도 동원력은 훨씬 열세였다. 독일이 총력을 다해 긁어모은 병력도 겨우 500만이었고, 그나마 최소한의 훈련이라도 거친 병력은 300만도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중에는 40~50대에 가까운, 대개 후방 지원 입무에 배치된 중장년 예비군[* 대다수는 그나마 개전 초반이었으므로 장교나 고급 부사관 신분 예비역이긴 했으나]도 수십만에 육박해서 독일군의 실질적인 전투 병력은 더욱 적었다. 그러나, 프랑스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잊고 싶은 악몽'''이었다. [[파일:2db4ba228524d759e5927e31f2752ebb561a04e6.jpg]] 위의 그래프는 프랑스에서 [[1914년]] [[1월]]에 실시한 인구조사 결과와 [[1934년]] [[1월]]에 실시한 인구조사 결과로, 1864년부터 시작된 고령화 때문인지 그럭저럭 완만한 곡선이 나타나는 1914년과 달리 1934년에는 청년층 부분이 남녀 불문 움푹 들어가 있다. 이는 1차 대전 당시 싸울 수 있는 남성이란 남성은 죄다 전쟁터에 끌려갔기 때문에 당연히 임신한 여성이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당시 현역이었던 40대 부근(정확히는 50대 중반이던 1878년생부터 30대 중반이던 1898년생까지)의 남성들을 보면 계단같이 움푹 파여있는데, 1차 대전으로 그만큼 죽었다. 당연히 동 나잇대 여성들과 비교해 봐도 압도적인 차이가 나온다. 위의 그래프처럼 프랑스는 1차 대전기 서부전선의 연합국 주력으로 많은 피를 흘렸다. 당시 프랑스는 징집적령기에 있는 18~27세 남성의 27%, 50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민간인 피해를 합치면 이보다 더 높았다.[* 본토 병력은 130만여 명 사망, 350만여 명 부상.] 이로 인한 인구 손실은 사실상 복구 불가능한 규모였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는 산업혁명 이후 타국에 비해 인구 증가율이 낮았다. 그래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시점에서 프랑스는 오히려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도 동원 가능한 인구가 더 줄었다. 이런 추세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그에 비해 전간기 동안 독일은 다방면에서 프랑스를 추월했다. 경제 위기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군사력은 미약했으나, 독일의 경제력은 이미 192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프랑스의 거의 2배에 육박했고, 인구도 프랑스를 명백히 압도했다.[* 당시 독일은 6천만의 인구와 세계 3위의 경제력을, 프랑스는 4천만의 인구와 세계 5위의 경제력을 가진 대국이었다.] 1차대전 개전 즈음인 1910년에 이미 독일과 프랑스의 징집 가능 인구 비는 1.6:1이었고, 1939년에 3:1 이상으로 벌어졌다. 특히 1935년 재무장 선언 이후 [[독일군]]의 신속한 회복을 본 프랑스는 독일의 잠재력에 큰 공포감을 느꼈다. 그래서 프랑스는 단독으로 독일과 맞서기보다는 대독 포위망 구성에 전력을 다했다. 독일이 허튼 짓을 못하도록 주변국과 함께 독일을 포위하자는 전략이었다. 이 집단 안보 체제하에서 독일을 포위하고, 만약 독일이 특정 국가를 침공한다면, 연합 공세로 독일을 분쇄하겠다는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독일을 포위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독일의 군사적 행동을 아예 사전에 방지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예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7년 전쟁에서 서쪽으로는 프랑스, 남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동쪽으로는 러시아, 북쪽으로는 스웨덴과 4면 전쟁을 벌이다가 멸망할 뻔했고, 1차 대전 때도 동부 전선으로의 전력 분산은 마른 전투 패배 이후에 전선이 고착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이런 동맹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독일이 전쟁을 시작해버리면 남은 국가들도 강제로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제 정치에서 이를 소위 '연루의 위험'이라고 부른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은 '방기의 위험'이다.] 그러나 동맹을 주도했던 프랑스는 정작 공격을 주도하기를 꺼렸다. 프랑스가 바란 것은 양면 전쟁이라는 위험성을 상기시키는 것만으로 독일이 알아서 물러나는 것과 저 강대한 독일에 단독으로 맞서는 게 아니라 동맹국들과 함께 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래서 벌어진 것이 [[오스트리아 병합|오스트리아 합병]]과 [[뮌헨 협정|체코 합병]]이었고, 프랑스는 결과적으로 동맹국들을 배신한 꼴이 되어 버린다. [[폴란드]]까지 방조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고, 이에 프랑스는 개전을 선포했다. 자르를 침공해 들어간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저항에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자르 침공 때 프랑스군은 40개 사단, 독일군은 22개 사단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프랑스군이 밀고 들어갔다면 나치 독일이 패망했을 것이라 보는 의견이 있지만, 이는 사실 관계를 정확히 살피지 않은 단견에 불과하다. 프랑스군이 '동원'한 사단이 40개이고, '투입'한 사단은 20개였다. 방어자가 훨씬 유리하단 점과 프랑스군을 막은 자르의 독일군이 대전차포와 각종 장비를 갖춘 병력이었단 점을 고려해 볼 때, 프랑스군의 자르 추가 공세는 말도 안되는 일이다. 애초에 자르에 20개 사단만 동원한 것도, 프랑스군의 준비가 미비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처럼 프랑스도 재무장과 전쟁 준비가 불완전했던 것이다. 내부 문제를 겪던 프랑스군은 서부 전선에 주둔 중인 독일군에게 10일 동안 무려 2천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에 따라 준비되지 않은 대규모 공세가 일으킬 재난을 두려워하던 프랑스군은 자르 침공 이후에[* 안 그래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는 공세를 위해 벨기에 방면을 비웠다가 단 6주 만에 전쟁에서 질 뻔한 역사가 있다.] 독일의 주공 방향을 먼저 틀어막고, 소모전으로 약체화된 독일군을 분쇄하는 것을 기본 전략으로 삼게 된다. 게다가 프랑스군은 해당 전략에 기가 막힌 수단을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마지노 선]]이었다. 마지노 선 덕분에 프랑스군은 주력을 프랑스 - 독일 국경이 아닌, 독일군의 우회 돌파 코스로 예상되던 벨기에 방면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만약 독일군이 마지노 선으로 정면 공격을 한다면 그거야말로 기대할 일이고, 우회 공격해온다 해도 적을 확실히 막아낼 수 있는 충분한 예비대가 존재했던 것이다. 더구나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선 전체를 마지노 선으로 차단한 데 그치지 않고, 1차 마지노 선 공사가 끝난 뒤 1940년에 벨기에와 프랑스 국경선 일대에서도 비교적 낮은 밀도로 요새선을 또 구축했다. 벨기에와 프랑스 사이 국경선은 본래 방어 대상이 아니었으나, 이 선에 요새를 구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벨기에가 독일의 침공을 받는다 해도 보호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될 수 있음에도 이루어진 조치다. 설령 독일군이 아르덴 일대 중부전선을 돌파했다 치더라도, 비교적 낮은 밀도라고는 했으나 이 방어선도 포화를 뚫고, [[마스 강]]을 도하하고, 강변에 즐비한 콘크리트 벙커들을 돌파해야 되는 만만찮은 방어력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 " 만약 독일이 우리를 공략하는 호의를 보인다면 프랑스는 독일에 10억 프랑을 주겠다!" >---- > 1940년 2월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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